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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유배지에는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 추모비’와 영정각, 3칸 초가, 애우당이 있고, 애우당 천장에는 여러 개의 현판이 붙어있다.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 절명시(絶命詩), 애우당기(愛憂堂記), 역모무고공술(逆謨誣告供述) 등 그 중 역모무고공술(逆謨誣告供述)이라고 써진 현판은 조광조 최후의 진술이 적혀 있다.
추모비는 현종 8년(1667)에 능주 목사였던 민여로가 세운 것이다. 뒷면에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이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석 아래의 거북이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는데 보수하면서 파 올렸고, 강당 쪽에 있는 문은 원래 비각 정면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초가와 영정각 등은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약력 조광조[趙光祖] 1482년(성종 13) ~ 1519년(중종 14)조선 중기의 문신.본관 한양. 자(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붙이는 이름)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 (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 紙,여러 가지 종이를 제조하는 사무를 관장하는 일, 종육품)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관청)에 들어갔으며 전적· 감찰· 정언· 수찬· 교리· 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오늘날 검찰총장)이 되었다.
주차료, 입장료 없음
대형버스 주차 가능
간이 주차장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