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문화유산

역사인물

역사인물

맨발의 성자 이현필(李鉉弼) 선생(1913~ 1964)
Writer관리자 Hit5712
맨발의 성자  이현필(李鉉弼) 선생(1913~ 1964) 1
○ 1913년 전남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농사짓는 아버지 이승로(李承老) 씨와 어머니 김오산(金烏山)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 1925년 (12세)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영산포로 돈을 벌기 위하여 나가다. 일본인 관파(管波) 씨가 세운 교회(일명 관파교회)에 다니며 기독교를 믿기 시작 ○ 1927 - 1932년 화순군 도암면의 숨은 성자 이세종 선생의 수도처에서 성경공부를 하던 중 그곳을 찾은 최흥종 목사, 강순명 전도사 등과 사귀며 광주로 감. ○ 1933 - 1934년 광주 YMCA 농촌사업협동조합 총무였던 어비손(G. W. Avison)이 세운 농업실습학교에서 기숙하며 신학문을 접함. ○ 1934 - 1936년 신안동 재매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며 백춘성 장로와 신앙적 교제가 이루어져 백춘성 장로는 일생동안 이현필선생과 동광원을 도움. ○ 1936 - 1937년 서울 YMCA 야간부 영어 학교에서 영어 공부하며 지식을 연마하고 현동완 서울 YMCA 총무, 풀무원 창설자 원경선 선생 등과 친분을 맺으며 넓은 세상을 알게 됨. ○ 1938년 (25세) 백영흠 목사의 처제 황홍윤 씨와 결혼, 화순가래몰에 분가하여 삼. ○ 1940년 (27세) 1932년부터 8년 동안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에 들어가 성경공부하며 영성기도 생활을 함. ○ 1943년 (30세) 전북 남원읍 삼일목공소 오북환 집사 집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성경 강해와 전도를 시작 ○ 1944년 (31세) 이현필선생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에 감화를 받은 신도들이 한 명 두 명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오북환 집사도 삼일목공소를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공동체에 들어와 정신적 지도자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수도자의 길을 걸음. ○ 1946년 (33세) 제자들과 광주로 와서 YMCA 구내에 머물다. 이때 정인세 총무와 신앙적 교제가 이루어져 일생 동안 친교를 나누고 YMCA를 중심으로 설교와 생활 지도를 하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사귀다. ○ 1947. 9. 1. 전북 남원 수지면 지리산 골짝 서리내(仙人來)에서 집단으로 소년소녀 14명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 무명의 수도공동체를 형성. 그 후 광주, 화순 도암에서도 가르쳤으며, 경기도 벽제 계명산에서는 1기에 10명 내외의 자매들을 1년씩 5기에 걸쳐 오북환 장로가 강사를 맡아 교육 ○ 1948. 3. 18. 수도공동체 가족과 서리내 성경 공부반이 광주로 이주. 처음에는 양림동 YMCA 소유 건물과 증심사 골짝 네 채의 가옥에 살면서 양림동 유치원 건물에 ‘양영원’이란 이름으로 30여 명의 소년소녀들에게 성경과 교양 공부를 가르침. 원래 양영원은 최흥종 목사가 세운 수양단체로서 나중에 이현필선생이 이 단체의 소년소녀들을 훈련시킴. ○ 1949년 (36세) 수도공동체가 방림동 밤나무골 부지 100여 평을 김판용 집사로부터 희사 받아, 그 터에 서울 YMCA 현동완 총무의 희사금으로 집을 지어 이주. 후일 백춘성 장로가 희사한 자산으로 봉선동 감나무골까지 확장, 매년 수양회를 열어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하신 다석 유영모 선생, 현동완 서울 YMCA 총무, 광주 최흥종 목사 등을 초빙하여 말씀을 들음. ○ 1949년 봄 서울 YMCA 현동완 총무의 초청으로 공동체 가족 일부가 서울로 진출, 삼각산과 경기도 능곡에 머무르다. 삼각산에 머문 가족들은 서울 YMCA에서 시행하는 강좌를 들었고, 20여 명은 현 총무가 세운 경기도 능곡 오원(吳園)에서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며 성경 공부와 수도 생활을 시작한 것이 서울 경기 지방의 복음 전진 기지가 되었고, 후일 벽제 계명산에 동광원 분원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다. 그해 여름 전도대를 조직, 걸식 탁발로 남원, 순천, 여수, 완도, 강진, 해남, 광주 등지를 순회 전도하였으며, 이때 순천 김정기 장로, 완도 김주환 목사, 강진 장성철 목사, 해남 이준묵 목사 등의 후원을 받다. 이 복음 전도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셨던 실제를 맛보는 값진 전도 순례가 되다. ○ 1949년 (36세) 수도공동체가 소외당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사랑으로 내 몸과 같이 돌보기 시작한 것은 1949년부터이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고아들이 늘어나자 이현필선생으로부터 딱한 사정을 들은 의사 김상욱 씨가 8만원을 희사하여 1949년 화순군 도암면 봉하리 청소골에 초가삼간을 매입하고 고아 8명을 김준호 제자와 정귀주 자매가 돌보기 시작하다. ○ 1950년 (37세) 1950년 1월 목포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던 윤치호 선생의 제안으로 광주를 중심으로 유지 70명이 모여 고아원 ‘동광원’을 설립 운영키로 합의하다. 당시 광주 YMCA 총무였던 정인세 선생에게 원장직을 맡아 운영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정인세 선생이 망설이고 있던 차에 이현필선생으로부터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 하느니라」라고 적은 쪽지를 받아보고 원장직을 수락하게 되다. 동광원 고아들을 황금동 적산가옥에서 수도공동체 가족들이 주축이 되어 돌보다. 6·25 전쟁 후에는 남자들은 지산동에서, 여자들은 양림동에서 정부와 외국 원조단체의 지원과 상무대 미군의 도움으로 무려 600여 명까지 돌보게 되다. ○ 1950년 (37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동광원 가족들과 미처 피난하지 못한 유하례 선교사를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으로 피신시켜 77일 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보호하다. 이 때 피난 과정에서 8명이 순교하다. ○ 1951년 (38세)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 소반바위 밑에서 벙어리 수도생활을 하던 이현필선생을 찾아간 정인세 원장에게 필답으로 ‘귀일원(歸一園)’ 이라는 이름과 함께 “곧 나가서 광주역을 배회하는 사람들을 데려다 따뜻하게 대접하고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이 운동은 귀일원 운동입니다. 반드시 시행하십시오.” 라고 적어주다. 정인세 원장은 말씀에 따라 오갈 데 없이 광주 시내를 배회하면서 광주역, 광주공원, 광주천 다리 밑에서 살던 고아, 과부, 걸인, 병자들을 치료하고 돌보았으며, 방림동 밤나무골로 데려와 대접하고 하룻밤씩 재워 보내며, 일부 공동체 가족들은 광주천에서 그들과 같이 생활하다. 이때부터 십시일반(十匙一飯) 운동과 일작운동(一勺運動)을 하며 사회복지사업의 기반을 구축하다. ○ 1955년 (42세) 후두결핵으로 몇 달 동안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채 한영우 제자가 생활하고 있던 서울 신촌 굴에 찾아가 “나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아닙니다.”하며 동광원 가족들이 고기와 약을 금기하는 율법주의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생선국물을 청하여 마시다. 고기와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진정한 믿음생활이 아님을 보여주다. ○ 1956년 (43세) 1951년, 이현필선생이 결핵환자를 간호하다 자신도 폐병에 걸렸으나 시련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계속하다. 투병 중 병세가 악화되자 제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에 입원하다. 입원 중 원장 고허번(H.A.Codington) 선교사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으며 두 사람 사이에 영적 교제가 깊어져 공동체 가족이 제중병원 간호보조원, 미화부, 매점 운영 등을 맡으며 10여 년 간 협력하다. 이 선생은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도 동광원 가족들이 영성 수도와 전도, 구제사업에 힘쓰도록 독려하다. ○ 1958년 (45세)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폐결핵은 불치병으로 경원시되어 환자들이 발붙일 곳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서울 YMCA 현동완 총무 후원을 받아 무등산으로 올라가는 산수동 골짝에 폐결핵 환자들을 수용하는 송등원을 설립하다. 오갈 곳 없는 환자 30여 명을 수용하고 무등산장 삼밭실을 중심으로 은거 생활하고 있던 환자들과 함께 보살피다. 이때 제중병원 원장 고허번 선교사의 도움이 컸으며 후일 김준호 제자에게 운영을 맡기다. ○ 1961년 (48세) 전남 화순군 도암면 중촌에 머물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산중(山中) 불쌍한 환자들을 심방 전도하며 제중병원 의료봉사대를 초청하여 치료를 받게 하다. 협동조합을 조직해 가난한 사람들끼리 공동생활로 협력하며, 산에 나무를 심고 유실수를 심을 것을 권장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서로 돕고 의지하여 바르게 살 것을 권장하는 농촌 운동을 펼치다. ○ 1964년 (51세) 1963년 50세 때 후두결핵으로 제중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가 1964년 초 퇴원하여, 거동이 불편함에도 “서울 종로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깨끗하게 살 것과 가난을 사랑할 것을 전하겠다.”며 제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울로 떠나간 것이 정든 고향에서의 마지막 발걸음이 되다. 일생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으며 죄인 됨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약한 자임을 고백하고 자아를 부인하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화순, 광주, 남원, 곡성, 순천, 해남, 진도, 함평, 서울, 경기도 능곡, 벽제 등지를 다니며 오직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다. “만물은 내 지체요, 인류와 이웃은 내 몸이다.”라 하고,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 51세를 일기로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계명산에11서 “오! 기쁘다”를 외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i 담당부서 : 관광진흥과 담당자 : 정다운 담당전화번호 : 061-379-3503
최근 업데이트 : 2017-01-09 조회 : 11,617